유조선(Tanker) 시장이 지정학적 충격을 동력으로 역사상 두 번째 수준의 초호황을 이어가고 있다.
영국의 해운전문지 로이즈리스트에 따르면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운임은 하루 10만 달러를 훌쩍 웃돌고 있으며, 수에즈막스와 아프라막스 역시 사상 최고 수준의 수익성을 기록하고 있다.
영국 해운 애널리스트 그렉 밀러(Greg Miller)는 3일 발표한 시장분석에서 "현재의 유조선 시장은 2004~2008년 슈퍼사이클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강한 호황"이라며 "이번 상승장은 수요 확대가 아닌 지정학적 혼란으로 인한 선박공급부족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강세장"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호황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 석유소비 증가가 아닌 '항로 차질'에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및 이란 제재, 호르무즈 해협 긴장, 홍해 후티(Houthi)반군의 공격, 흑해 군사 충돌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선박들은 우회항로를 선택하거나 위험 해역 통과를 기피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실제 원유 수송량은 감소했지만 선박 운항거리를 의미하는 톤마일(Ton-mile) 은 오히려 크게 증가했다.
시장조사업체 보텍사(Vortexa)에 따르면 지난 7월 글로벌 해상 원유·석유제품 수송량은 전년 대비 4% 감소했다. 또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세계 석유수요가 지난해보다 하루 100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 2000년대와 완전히 다른 슈퍼사이클
전문가들은 이번 호황을 2004~2008년 유조선 슈퍼사이클과 비교하면서도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2000년대에는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원유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수요가 운임을 끌어올렸다. 반면 현재는 세계 경제성장 둔화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갈등이 선박공급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운임을 밀어 올리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 Evercore ISI의 운송담당 애널리스트 존 채플(John Chappell)은 "1990년 이후 VLCC 운임이 하루 10만 달러를 넘은 사례는 23차례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4주 이상 유지된 경우는 7차례 뿐이었다"며 "현재처럼 수개월 동안 10만 달러 이상이 지속되는 상황은 아주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 다극화 시대를 맞은 유조선 시장
시장에서는 이번 상승장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지정학 전문 컨설팅업체 비스포크그룹의 제이콥 샤피로(Jacob Shapiro) 애널리스트는 "세계는 자유무역 중심의 단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전환되고 있다"며 "지정학적 혼란은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그는 "유조선 산업이 성장한 이후 지금과 같은 다극화 시대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며 "앞으로도 새로운 분쟁이 기존 분쟁을 대체하면서 높은 톤마일 구조가 장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 "흑해 수에즈막스 운임 하루 33만 달러"
실제 운임은 여전히 사상 최고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발틱해운거래소(Baltic Exchange)에 따르면 3일 기준 미국 걸프–중국 노선 VLCC 운임은 하루 12만 3,408달러, 서아프리카–중국 항로의 VLCC는 11만 3,605달러, 오만–중국 노선 VLCC 13만 6,727달러를 각각 기록했다.
특히 흑해–지중해 노선 수에즈막스 운임은 하루 33만 7,728달러까지 치솟으며 지난 3월 호르무즈 위기 당시 기록한 사상 최고치(34만 4,198달러)에 근접했다. 이 노선 운임은 최근 2주 동안 두 배 이상 급등했다.
■ 아프라막스, 수에즈막스 추월
최근 시장에서는 아프라막스 강세가 두드러진다.
미국 상장 탱커선사 티케이탱커스의 최고경영자(CEO) 케네스 비드(Kenneth Hvid)는 최근 실적발표에서 "최근 몇 주 동안 일부 항로에서는 아프라막스 운임이 수에즈막스를 넘어서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전했다.
발틱해운거래소 기준에 따르면 아프라막스의 하루 운임은 카리브해–미국 걸프 노선에서 11만 4,211달러, 북해–유럽 10만 4,571달러, 미국 걸프–유럽 항로 10만 2,980달러를 나타내는 등 주요 아프라막스 항로에서 운임이 모두 10만 달러를 웃돌고 있다.
■ 석유제품운반선도 비수기 없이 강세
석유제품운반선(Product Tanker) 시장 역시 계절적 비수기를 무색하게 하는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스콜피오탱커스의 최고상업책임자(CCO)인 라스 덴커 닐센(Lars Dencker Nielsen)은 "수십 년 동안 업계에 있었지만 7~8월 시장이 이렇게 강했던 적은 처음"이라며 "올해 여름은 통상적인 비수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미국 걸프–유럽(MR) 노선 운임은 3만 8,046달러, 미국 걸프–브라질은 4만 987달러, 지중해–아시아 노선 LR2는 3만 3,568달러를 각각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각각 81%, 51%, 335% 급등했다.












